4월, 그 뜨거운 가슴과 만나다
4.19혁명희생자 영령봉안소와 4.19혁명희생자 위령탑
- 1. 4.19영령 봉안소 건립과 위령탑 이설의 의의
- 4.19 영령들의 고귀한 정신이 역사와 교육체험의 마당으로
4.19혁명 유족과 부산 시민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영령봉안소가 준공되어 4.19영령들의 고귀한 넋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보금자리가 마련되고, 또한 용두산공원에 있던 4.19위령탑이 이설되어 숭고한 4.19 정신을 기릴 수 있는 공간이 한 자리에 마련되었음은 매우 기쁘고 반가운 일입니다.
1960년 이승만 독재정권의 부당한 권력에 맞섰던 4.19혁명 희생자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부산시민들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세워진 것이 바로 4.19희생자 위령탑입니다. 이러한 4.19희생자들의 의로운 민주항쟁 정신이 부마민주항쟁으로 이어지고 5.18민주항쟁, 6월민주항쟁으로 계승되어 오늘날의 우리가 있음은 모두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2007년 6월민주항쟁 20년을 맞는 뜻 깊은 해에 맞추어 4.19혁명 희생자 영령봉안소와 위령탑이 한 곳에 조성되어 부산 시민들의 자긍심을 드높이고, 또한 우리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역사로 길이 남겨줄 ‘역사 체험과 교육 현장’으로 ‘4.19혁명 희생자 영령 봉안소와 위령탑’의 의의와 가치는 더욱 빛날 것입니다.
- 2. 4.19민주항쟁
- 4.19민주항쟁(1960년)
-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와 결탁하여 반공과 북진통일을 명분으로 민주적, 민족적 자주세력을 테러로 탄압하였으며 빈곤에 신음하는 국민경제는 오로지 미국원조에 의존하여 이에 기생하는 매판적 정상배들만 배를 불리는 등 모순이 심화되고 있었다.
1960년 3월 15일 청년학생들은 정ㆍ부통령선거에서 자유당정권이 저지른 파렴치한 부정선거를 계기로 일제히 궐기하였다.
2ㆍ28 대구학생시위, 3월~4월 18일에 이르는 부산ㆍ마산지역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학생시위는 마침내 4월 19일의 ‘피의 화요일’로 치닫게 된다. 특히 4월 11일 시위도중 눈에 최루탄을 맞은 김주열 군의 사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자 분노의 물결은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4월 19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대규모 시위는 절정에 달해 마침내 경찰의 발포로 대규모 유혈사태가 빚어졌다.
부산에서는 19일 상오 경남공고, 부산상고, 데레사여중ㆍ고, 동래고교 등의 학생과 일부 대학생, 시민 등 2만여 명이 시위에 나섰고 경찰의 발포로 유혈사태가 발생하였다. 격노한 시민들은 부산진경찰서를 점거ㆍ파괴하는 등 격렬한 항쟁을 벌였다.
이승만 정권은 국민적 저항 앞에 사태를 무마시키려 하였으나 4월 25일 서울 각 대학 교수 259명은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평화적인 가두시위를 벌였고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이 4월 26일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12년 독재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 3. 4.19광장 조성 경과
- - 4.19혁명 희생자 영령봉안소 건립과 위령탑 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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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 419혁명 희생자 위령탑
- ○ 설치목적 : 1960년 4월 19일 혁명당시 희생자(19인) 추모
- ○ 위 치 : 1962년 용두산공원 광장에 건립, 2007년 2월 15일 민주공원으로 이설
- ○ 규 모 : 높이 11m, 석조
- ○ 설 치 자 : 국제신문(당시 국제신보사)이 주관하여 시민들 성금으로 조성
- ㆍ4.19혁명 희생자 영령봉안소
- ○ 4.19광장 조성 : 2,432㎡ 부지에 4.19위령탑 이전 설치하고 영령봉안소 1개소를 건립하여 4.19광장으로 조성
- ○ 봉안소 건립 : 73㎡ 규모, 희생자 및 부상자 33인 영정사진 봉안
- ○ 공사기간 : 2006년 8월 18일~2007년 2월 15일
- ㆍ조성 경과
- 2004. 10. 12 사적시설 확충사업 추진계획 수립
- 2004. 12. 18 자금교부 결정(15억)
- 2006. 8. 18 공사 착공
- 2007. 2. 15 공사 준공